[CP의 범람]⑦금단의 열매, 옵션CP의 부활

한동안 시장에서 사라졌던 옵션CP(계속매매조건부 기업어음)가 조용히 부활했다. 옵션CP는 2003년 카드사태의 주범 중 하나로 지목되며,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몇년 전부터 CP 시장의 큰손, 은행 종금계정이 나서 거래를 재개하고 있다. 카드대란 당시 금융당국의 강도 높은 사정을 비껴간 은행들이 대출의 일종이라는 명목으로 물밑거래를 시작한 것이다.

A1 등급 대상, 저금리로 ‘변형’

현재 옵션CP는 중장기 할인어음이라는 이름으로 종금업을 겸하고 있는 은행들(신한, 우리, 외환)이 취급하고 있다. 명칭만 바뀌었을 뿐 약정 내용이나 구조는 과거 옵션CP와 거의 동일하다.

중장기 할인어음은 3개월 만기 CP를 일정기간(통상 3년) 동안 자동으로 차환 발행할 수 있도록 이면 계약을 맺고 있다. 약정 위반시 소정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점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

단지 논란의 당사자였던 투신사를 대신해 은행이 계약주체로 나섰다는 점이 바뀌었을 뿐이다. 우량 기업을 대상으로 금리 수준을 다소 낮췄다는 점도 차이라면 차이다.

은행들은 신용도가 높은 A1등급 기업을 중심으로 옵션CP를 적극적으로 매입하고 있다. 대부분 정부나 지자체를 등에 업고 있는 공기업이 대상이다. 은행 입장에서 리스크 관리가 수월하고, 대규모 자금을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발행사의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차환 매입을 거절할 수 있도록 계약을 맺고 있어, 유동성 위험에서도 한발 물러서 있다. 은행으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인 셈이다.

은행권 종금부 한 관계자는 “과거 옵션CP는 여신기능이 없는 투신사가 발행사와 직접 도장을 찍고 편법으로 펀드 등에 편입한 것이 문제가 됐다”며 “그러나 중장기 할인어음은 CP를 매개로 한 대출 약정의 한 형태로 은행이 여신을 주업무로 하고 있어 큰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또 “금리가 낮긴 하지만 보통 발행사의 신용등급이 하락하면 차환 발행을 중단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금리혜택을 주는 대신 발행사가 상당 부분 리스크를 떠안고 있는 형태라는 것이다.

실제로 은행들이 주도한 옵션CP의 금리는 일반CP와 비슷하거나 다소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과거 옵션CP의 경우, 매입금융기관들이 만기연장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높은 금리를 제시하는 게 보통이었다.

현재 옵션CP 금리는 당사자간 협의에 의해 양도성예금증서(CD), 일반대출, 이자율스왑(IRS) 등을 고려해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3개월 차환 때마다 91일물 CD금리에 신용스프레드 10∼20bp 정도를 더해 결정되는 변동금리 구조로 알려져 있다.

최근 1년간 일반CP의 CD 대비 평균 스프레드 차가 33bp라는 점을 감안하면 옵션CP 금리가 일반CP 금리보다 도리어 낮은 경우도 발생한다. 일부 기업에서는 스왑을 통해 고정 금리화하는 사례까지 감지된다.

은행.발행사, 리스크 ‘불감증’

문제는 일부 기업들이 금리혜택과 만기연장 효과에 현혹돼 옵션CP를 무차별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1조원 내외의 옵션CP를 대량으로 발행하는 경우도 눈에 띈다. SH공사와 한국전력공사가 대표적인 사례.

현재 SH공사의 옵션CP 잔액은 1조3000억원선에 달하고, 한국전력공사 역시 8000억원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전체 CP 잔액의 67-90%선에 달하는 엄청난 량이다.

더 심각한 점은 본질적으로 단기금융상품인 옵션CP를 중장기할인어음이라는 명목으로 지표상 장기차입금으로 잡고 있다는 것이다. 발행사들이 풍부한 유동성을 보유한 은행과의 약정에 무한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 일부에서는 기업 신용등급 하락 시 은행들이 일방적으로 매입을 중단할 수 있다는 계약 내용을 간과하는 경우도 있다.

한 공기업 재무 담당자는 “발행 기업들이 조달정책 변동 등으로 조기에 상환할 일이 생기면 위약금을 지불하면 된다”면서 “그러나 여신업무를 수행하는 은행 입장에서 핵심 고객에 대해 매입을 반대할 이유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과거 옵션CP와 관련한 논란 역시 금융기관에 대한 무모한 믿음에서부터 시작됐다.

2003년 당시, 매입 금융기관이었던 투신사들은 카드사들이 유동성 위기에 봉착하자 발행사에 조기 상환을 요구했다. 그 결과 이면약정을 문제삼은 카드사와의 분쟁이 시작됐고, 머니마켓펀드(MMF) 투자자와의 갈등으로까지 비화됐다. 물론 금감원은 투신사가 옵션CP를 MMF에 편입한 것을 문제 삼았지만, 발단은 금융기관의 이면약정 위반에서 비롯됐다.

증권사 한 크레딧 애널리스트는 “은행 종금계정의 옵션CP를 위법이라 볼 근거는 없지만, 과거처럼 유동성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금융당국이 개입할 수 있다”면서 “당장은 금감원이 시장충격을 우려해 관조적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카드사태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말했다. 또 “이러한 제도적 리스크를 간과하고 있는 것 또한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카드대란 주범, 옵션CP란

옵션CP는 일정기간(1～3년) 동안 3개월 만기 CP를 자동 차환 발행할 수 있도록 이면계약을 맺은 기업어음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장기간 만기 연장을 보장받을 수 있고, 매입금융기관들도 높은 금리를 제시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한때 각광 받았다.

그러나 2003년 카드대란 이후, 최대 매입기관이었던 투신사들이 금융당국의 철퇴를 맞으면서 시장에서 종적을 감췄다.

당시 금융감독원은 투신사가 옵션CP를 머니마켓펀드(MMF)에 편입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또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지만, 유가증권에 해당하는 CP의 만기를 왜곡하는 이면계약을 문제 삼아 옵션CP 매매 자체를 사실상 금지시켰다.

중개에 나섰던 증권사들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조기환매 때 위약금을 내도록 약정을 체결한 것은 일체의 보증행위를 금지한 관련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은행에게는 사정의 칼날이 미치지 않았다. 옵션CP 편입액이 상대적으로 적고, 논란의 초점이 투신사의 MMF 편입에 따른 카드사 및 투자자와의 분쟁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은행으로서는 금융당국이 급한 불을 끄는 것을 예의주시하며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옵션CP가 시장의 관심에서 멀어지자, 중장기 할인어음이라는 이름으로 물밑거래를 재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