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간 재벌 회장 혼자서도 잘해요!"

머니투데이

권성희 기자

3일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특별수행원 부문별 간담회에서 경제, 문화예술학계, 여성 등 각 부문별 참석자들이 줄지어 입장하고 있다. 맨 왼쪽에 정몽구 현대차 회장,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본무 lg 그룹 회장, 최태원 SK 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지난 2~4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기간 중에는 대기업 회장들도 수행비서 하나 없이 다른 특별수행원과 같이 대형버스로 이동하며 단체행동을 하는, 쉽게 보기 힘든 풍경이 펼쳐졌다.

지난 2일 새벽 5시20분 경복궁 주차장에 모여 평양으로 출발할 때부터 4일 오후 10시20분 남측 출입사무소(CIQ)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귀국보고회가 마무리될 때까지 65시간 동안은 대기업 회장들도 방북 수행원의 한 명일 뿐이었다.

기자로서도 늘 몇 명의 수행비서들이 겹겹히 둘러싸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았던 대기업 회장들에게 허물없이 다가가 질문하고 대화하는 쉽지 않은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다만 남북 경제협력에 대한 투자 여부와 관련, 언론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다가온 기자의 질문에 어쩔 수 없이 대답은 했지만 원론적인 답변으로 비켜가고 가능한 긴 대화는 피하려 했다. 몇 번을 다가가 인사해도 눈길조차 제대로 마주치려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 2일 새벽 5시20분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구본무 LG 회장, 최태원 SK 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들과 이구택 포스코 회장,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은 직접 자신의 가방을 들고 대형버스에 올라타 평양으로 출발했다.

남측 CIQ와 북측 CIQ를 자신의 가방을 들고 통과한 기업인들은 타고 가던 버스가 개성-평양간 고속도로 사이의 유일한 휴게소인 수복휴게소에 잠시 쉴 때 내려 화장실에 다녀 오거나 북측에서 준비한 음료수를 마시며 다른 수행원들과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눴다.

기업인들은 평양 도착 직후 4·25 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공식환영식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김책공업종합대학 전자도서관 관람과 북한측 환영만찬 참석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호텔로 돌아와 옷을 챙기고 자료를 정리하는 것도 수행원 도움 없이 혼자 처리해야 했다.

방북 이틀째인 3일 오전 기업 회장들은 인민대학습당에서 열린 특별수행원들의 대기업 부문 간담회에 참석했다. 간담회에서 특별수행원들은 '대기업' '사회·문화·학술' 등 북측 여성 안내원이 들고 있는 회담분과를 적은 안내판 앞에 한 줄로 나란히 선 뒤 이 안내원을 따라 줄을 지어 간담회장에 입장했다.

북한 여성 앞에 나이든 대기업 회장들이 한 줄로 나란히 서서 기다리는 모습은 진풍경이었다. 이 때 A회장과 B회장은 서로 앞에 서지 않으려고 가볍게 농담을 주고 받으며 양보하다 결국 A회장이 마지못해 제일 앞줄에 서서 주위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날 오찬은 노 대통령이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서 주최했다. 이 곳에서 정몽구 회장과 구본무 회장을 포함한 대기업 회장들은 노 대통령 내외가 도착할 때까지 일제히 대동강이 보이는 널찍한 테라스에 나와 다른 수행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다만 정 회장과 현정은 회장은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듯이 보였다. 특히 현 회장은 점심을 먹을 때 정 회장을 비롯한 재벌 총수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앉지 않고 다른 테이블에 앉아 눈길을 끌었다.

대기업 회장들은 오찬 뒤에 곧바로 미술품 제작 및 전시관인 만수대 창작사를 둘러보고 3대혁명 전시관 중 중공업관을 방문해야 했다. 그러나 빡빡한 일정에 지친 탓인지 만수대 창작사에서는 미술품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피곤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고 중공업관 관람에는 아예 불참했다.

대기업 회장들 중 가장 젊은 최태원 회장은 행사장에서 연장자인 다른 기업 회장들 뒤에 멀찍이 떨어져 따로 다니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하얀색 묵직한 가방을 들고 다니는 최 회장에게 '해외 출장 갈 때도 가방을 직접 자주 들고 다니냐'고 질문하자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고 짧게 대답했다.

대기업 회장들은 평양 방문 셋째 날인 4일에는 노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간 오찬에 배석하기 위해 조그만 방에서 무작정 한시간 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평양 행사가 끝난 뒤에는 노 대통령을 따라 개성공단을 방문하고 남측 CIQ에서 진행된 귀국보고회까지 끝까지 지켜봤다. 구본무 회장은 노 대통령의 귀국보고가 끝나자마자 급히 뛰쳐나와 화장실을 찾기도 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평양에 자주 다녀본 대기업 회장들에게조차 근래에 겪어보지 못한 이색적인 경험이었을 것 같다. 4일 밤 다시 수행원들과 전용차량을 만난 대기업 회장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가히 짐작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