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서 육포로 저녁 때운 회장님들

머니투데이

이진우 기자

"방북이 힘들지 않으셨습니까"(취재진)-"아직 저녁도 못 먹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을 수행한 뒤 4일 밤 늦게 청와대 연무관 앞에 도착한 재계 총수들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데다 도착시간까지 크게 늦어진 탓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들은 방북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예 언급을 피하거나 간단하게 원론적인 답만 하고는 서둘러 대기중인 차에 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재계 인사들은 이날 당초 예정된 일정에 일부 차질이 생긴데다, 장기간 차로 이동하거나 대기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저녁식사조차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다고 한다.

4일 개성에서 열린 개성공업지구 설명회에서 기업인들을 포함한 노무현 대통령 수행원들이 공단 현황 등에 대해 설명듣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은 이날 도착 직후 박정인 수석부회장, 설영흥 중국담당 부회장 등 경영진들과 시내의 한 해장국집으로 이동, '제대로 된 메뉴'로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구본무 LG회장도 "아직 저녁도 못 먹었다"며 피곤한 표정을 지었고,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역시 "저녁을 먹지 못했다"며 서둘러 자신의 승용차에 올랐다.

실제 이날 대기업 총수와 최고경영자들은 빠듯한 일정 때문에 저녁식사도 거르는 강행군을 펼친 것으로 전해졌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회장들이 점심을 먹고 난 이후 거의 12시간 가까이 식사를 못했으며, 그나마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차 안에서 육포 등으로 허기진 배를 달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총수들은 아울러 노 대통령에 앞서 도라산역에 도착, 약 2시간 가량을 비좁은 의자에 앉아 대기하기도 했다.

평소 어디를 가나 수행원을 늘 대동하고 다니던 재계 총수들로선 '수행원 없는 대통령 특별수행'이 익숙치 않은 고달픈 일정의 연속일 수 밖에 없는 형국이다.

이는 북한에 갔던 총수들을 영접하기 위해 4일 초저녁부터 장시간 대기하고 있던 대기업 관계자들의 난처한 표정에서도 그대로 읽혀졌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회장께서 40여명이 넘는 다른 경제계 인사들과 함께 수행원도 없이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려면 아마도 힘이 많이 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회장들 스스로는 대통령을 수행하는 입장이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지 모르지만 그 분들을 모셔야 하는 우리들 입장에선 솔직히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상당수 재계 관계자들은 이날 저녁 도라산 남북출입관리사무소에서 열린 노대통령의 방북보고를 생중계로 지켜보면서 간간이 TV에 비친 회장들의 안색을 통해 건강여부 등을 자세히 살폈다는 후문이다.

재계 관계자들은 그러나 2004년 노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때 거물급 재계 총수들이 작은 미니버스에 한꺼번에 웅크리고 앉아 함께 이동하면서 벌어졌던 논란 때문인지 회장들이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시각을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당시 노 대통령을 수행했던 이건희 삼성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구본무 LG회장, 최태원 SK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등의 '미니버스' 이동을 놓고 "고령의 재계 인사들을 너무 가볍게 대한 것 아니냐"는 불만이 나왔지만, 다른 한편에선 "재계 총수를 그럼 떠받들고 다녀야 하느냐"는 역비판이 제기되면서 하나의 해프닝으로 마무리 된 바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에 대해 "(재계 총수외에) 다른 특별 수행원들도 다 비슷한 상황인데다 정상회담의 중요성, 북한상황의 특수성 등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