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인생 멀리보고 도와주세요"

서울 강남의 한 기자실에서 남부순환로 공항방면으로 30분 정도 차를 몰았을까. 난곡사거리에 다다랐다. 전화 통화로 현재 위치를 알리고 목적지 확인하기를 수차례. 신림12동 어린이 방과후 교실인 '물댄동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댄동산'은 이곳에 어린이 쉼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복잡한 상가 건물 3층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학교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도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읽고 싶은 책을 꺼내 읽는 등 저마다 분주하다.


한 켠에서 활기찬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 짓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손 빈(57) 전 액츠투자자문 사장이다. 2004년 은퇴 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평소 관심이 많았던 사회복지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사회복지법인 '이웃사랑실천회' 이사장을 맡아 어린이 복지시설 운영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가난했지만 항상 밝고 당당했던 어머니

손 이사장의 아버지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본 도쿄에서 공부한 유학파다. 하지만 30대에 할아버지가 물려준 공장을 말아먹고는 평생 재기하지 못했다. 당시 유명 시인들과 어울릴 정도로 학식이 높았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생활력 없는 아버지 때문에 가족의 생계를 떠 맡은 것은 손 이사장의 어머니. 가난한 생활과 궂은 일에 몸과 마음이 지쳐도 자녀들에게는 항상 웃음을 줬다. 손 이사장과 누나, 남동생 등 3남매가 모든 일에 긍정적인 것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다.

손 이사장과 남동생은 부산 지역 명문인 부산중학교, 부산고등학교를 나왔는데 담임 선생님들이 가정방문을 와서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손 이사장 형제가 평소 너무 밝아 생활이 이렇게 어려운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손 이사장의 어머니는 자녀들의 교육을 인생 최우선 순위로 삼았다. "아무리 가난해도 공부는 꼭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자녀들이 학교에서 기죽는 것이 싫어 밥은 굶어도 학교 준비물은 반드시 챙겨 보냈다. 학부모회에도 꼭 참석했다.

손 이사장은 "참 정의로운 분이었다"고 어머니를 회상했다. 1962년(손 이사장 중학교 시절) 전세로 살던 집이 소송에 걸려 전세금을 날릴 위기에 처했는데 어머니가 직접 나서 해결했다. 소송 상대는 당시 실권자였던 민주당 국회의원이었고 집주인은 제대로 재판을 진행하기도 전에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재판은 3차까지 이어졌고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어머니는 대법원 판사들에게 돌릴 탄원서를 직접 썼다. 장남이었던 손 이사장은 어머니 옆에서 틀린 맞춤법을 고쳐가며 함께 탄원서를 만들었다. 변호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어머니는 며칠 밤을 새며 발언할 내용을 준비하며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고 3년여만에 승소했다.


◇직장생활 성공 비결은 '성실과 겸손'

손 이사장은 군대 제대 직후인 1975년 대우그룹 공채 3기로 입사했다. 집안 형편이 여전히 어려웠던 터라 여러 회사의 조건을 잴 상황이 아니었다. 연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가 발령받은 곳은 대우증권 조사부.

"대학때 인문서적만 읽었지 경제 관련 지식이 전혀 없어 입사 초기 맘 고생이 심했습니다. 명문고, 명문대 나온 서울 출신 동기들 사이에서 전 완전히 열등생이었어요. 잘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어느 위치에서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것이라던 어머니 말씀이 힘이 됐습니다."

손 이사장은 퇴근 후 학원을 찾아 회계학 등 업무 관련 강의를 들었고 4∼5년이 지나면서 회사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70∼80년대엔 모든 부서를 두루 거치며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보편적이었지만 손 이사장은 인사가 있을 때마다 조사부에 남기를 자청하며 한 우물만 팠다.

1984년 증권시장이 부분 개방되면서 대우증권은 경제연구소를 설립, 외국계 투자자 유치에 나섰다. 이 때 리서치 전문가로 인정받던 손 이사장은 연구소 설립부터 운영까지 주도적 역할을 한다. 외국인 투자자들 사이에서 '한국 증권시장 전문가'로 통하면서 1987년엔 미국계 증권회사인 푸르덴셜투자증권으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1987년 연봉이 8만달러였으니 정말 파격적인 대우였죠. 대우증권 차장 월급과는 비교가 안 됐어요. 어려서부터 넉넉한 생활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돈이 갑자기 너무 많이 들어오니 적응이 안 될 정도 였어요."

◇'마이크로' 아닌 '매크로'하게 살아야

손 이사장은 수십년간 증권회사에 근무했지만 현직에 있을 때 주식에 직접 투자한 적이 없다. 제 돈을 넣고 불리려고 마음먹으면 시장을 제대로 읽고 분석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였다. 조사부를 이끄는 리서치헤드가 된 뒤에도 부하 직원들에게 "주식 투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주식 투자하는 시간에 일에 몰두해 몸값을 높이는 것이 훗날 더 남는 장사라고 설명했다.

개별 종목보다는 전체 시장의 흐름을 분석하다보니 부동산 시장도 한 눈에 들어왔다. 87년 집값이 바닥이라는 판단이 들었고 대우증권에서 나오면서 받은 퇴직금과 보유했던 우리사주 등을 정리해 과천 45평형 아파트를 과감히 매입했다. 6000만원에 산 아파트를 4년 후인 1991년 3억2000만원에 팔아 큰 차익을 남겼다. 또 당장 남북통일은 안돼도 경제통합은 되리라는 판단이 들어 10여년 전에 경기도 파주에 2000만∼3000만원 규모 땅을 사뒀다. 그 땅의 현재 시가는 20억∼30억원을 호가한다.

손 이사장은 자녀교육에도 이 같은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작은 것 하나 하나에 집착하기보다는 자녀의 인생을 하나의 큰 틀로 삼고 탄탄한 뼈대를 세울 수 있도록 진심으로 도와준다.

손 이사장의 아들(27)은 고려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공부 잘하던 아들이 철학과에 가겠다고 했을 때 손 이사장의 부인은 반대했지만 손 이사장은 적극 지원했다. 요즘같이 복잡한 사회에서는 단순하고 명쾌하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군대를 마친 아들은 건축디자인을 공부하고 싶다며 요즘 미술학원에 다닌다. 군대 제대 후 생계를 위해 취직했던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돼 처음엔 속이 상했지만 아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건축 이론과 기술만이 아니라 열린 생각과 열정을 가진 멋진 건축가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손 이사장의 딸(24)은 미국 버지니아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 지금은 미국 유명 대학에 진학했지만 딸의 고등학교 시절은 파란만장했다. 공부를 잘 해 고등학교를 민족사관학교로 진학했지만 너무 치열한 경쟁, 부족한 인성교육 등에 적응하지 못해 1년만에 서울로 올라왔다. 숙명여고로 전학한 후에는 민족사관고에서 받은 낮은 내신성적 때문에 원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 없다며 몇날 몇일을 고민하더니 자퇴를 선언했다. 검정고시로 대학입학 시험을 치러 경희대 호텔경영학과에 입학했고 1년 뒤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손 이사장은 "자식이 학교를 관두겠다는데 부모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냐"며 "하지만 무조건 안된다고 반대하기보다는 자기 장래를 개척하려는 노력을 인정했고 지금은 좋은 결과가 있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아동.청소년 종합복지시설 조직화할 터"

평소 사회복지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손 이사장은 1991년 푸르덴셜투자증권에서 나와 정진호 현 푸르덴셜투자증권 사장, 곽태선 현 세이에셋코리아 사장 등과 함께 '에셋코리아', '액츠투자자문' 등을 설립하면서부터 사회복지사업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고 관련 인사들과 꾸준히 친분을 맺어왔다.

2004년 증권업계에서 완전히 은퇴하면서 사회복지법인 '이웃사랑실천회'를 맡아달라는 제의가 왔고 흔쾌히 수락했다. '한국기독교개혁운동'을 비롯해 지인들의 도움으로 이달초 서울의 대표적 낙후지역인 관악구 난곡지구에 '공부방' 개념의 아동 쉼터인 '물댄동산'의 문을 열었다.

항상 물이 흘러 아이들이 살기 좋은 곳이란 의미의 '물댄동산'에는 개설한 지 한달도 지나지 않아 20여명의 아이들이 모여 들었다. 부모들이 맞벌이를 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계층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방과 후 학원이나 과외 지도를 전혀 받지 못했던 아이들은 '물댄동산'에 온 이후 활기를 찾고 있다.

물댄동산에서는 교사들이 아이들의 알림장을 확인해 숙제 지도에서 과제 준비, 영어.수학.한자.미술.음악 등 각 과목의 심화 학습까지 맡고 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놀토'에는 연극.바둑.요리.현장견학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난곡지구에 이어 노원과 구로 등에도 2차, 3차 아동복지시설을 열 계획입니다. 최소 단위 복지시설인 공부방에서 시작해 아동.청소년종합복지시설로 키워나가고 싶어요."

손 이사장은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진학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과 아동복지시설 아이들을 연계할 생각이다. 자신이 어려움을 겪어봐야 진짜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만큼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아이들을 돌보게하고 장학금을 줄 예정이다.

손 이사장은 "박봉에도 사명감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선생님, 아이들을 돌보고 싶다며 학교를 휴학한 자원봉사 대학생 등을 보며 매일 매일 감동하고 있다"며 "도움을 받은 우리 아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